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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아함경 읽기 -세번째

글쓴이 : 동암합장 날짜 : 2012-01-30 (월) 13:43 조회 : 1149
다시 활쏘기로 시합을 하였는데 쇠북을 십리마다 하나씩,
일곱 개를 놓고 겨루기로 하였다.
시합에 참가한 이들이 모두 명사수이었지만
하나의 북에도 도달한 사람이 없었다.

데바닷타가 쏘자 하나를 뚫고 두 개를 맞추었으며,
난다는 두 개의 북을 지나 세 개째의 북을 꿰뚫었다.

이어 부처님이 나서서 쏘려고 했지만
활을 당기면 모두 꺾어져 손에 맞는 것이 없었다.
부처님이 신하에게 일러 선조의 사당에 가서 활을 가져오라고 하자,
곧 가서 활을 가져 오는데 두 사람이 들어야 할 정도로 무거웠다.

부처님이 활에 시위를 매자 활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 같았고
활을 잡아다 끌어다 튕기자 그 소리가 40리까지 들렸다.
활에 화살을 먹여 쏘았더니, 일곱 개의 북을 뚫고 지나갔고,
재차 쏘자 북을 뚫고 땅으로 들어 가서 샘물이 솟아났다.
수행본기경 시예품 20-21쪽

- 시예품, 글자 그대로 무예를 겨루는 품입니다. 싯다르타 태자가 17세가 되었는데 명상에만 잠기고 국정을 돌보는 일에는 관심이 없자 정반왕이 신하들에게 대책을 세우라고 합니다. 여러 가지 대책이 나왔지만 이제 다 컸으니 장가를 보내자는 의견이 가장 마음에 든 정반왕은 이웃나라 선각왕의 딸에게 청혼을 합니다.

그러나 선각왕의 딸은 싯다르타 태자에 대해 잘 모르니 무예대회를 열어 거기에서 실력을 보고 결정을 하겠다는 제안을 합니다. 그래서 열린 무예대회에서 물론 싯다르타태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으로 우승을 합니다.

우승을 한 싯다르타 태자는 선각왕의 딸과 결혼을 하고 시예품에 보면 이후 정반왕에 의해 2명의 부인을 더 맞이하지만 여전히 환락과 쾌락은 멀리하고 깊은 명상에 잠기는 일이 잦아집니다.

부처님이 태자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를 결심하시는 과정이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앞으로 유관품에서 사문유관이야기가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출가동기에 대해서 남방불교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대승불교권에서는 깨달음을 얻으시고 난 후의 일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지요..


===부처님의 일생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대승불교에서는 팔상록이라는 다소 신비화된 경전이 전해져오는데 그 경전에서 부처님은 천상에서 내려와 생노병사의 고통을 보고 출가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남방불교에서는 보다 사실적이고도 구체적인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부처님이 출가하게 된 동기를 정치적으로 찾고 있는 이야기는 우리에게는 충격이다.

부처님이 출가하기 전에 동족인 석가족과 구리족 간에 분쟁이 일어났다. 분쟁이 일어나기 전에 아버지 정반왕은 부처님이 태자로서 나라를 이어받아 통치하는 일보다 인생의 근본문제에 심각한 고뇌를 하는 것을 보고 걱정을 하다가 측근의 건의를 받아들여 태자에게 농사를 짓는 일을 총괄하는 직책을 맡겼다고 한다.

당시 국가에서는 농사를 짓는 일을 맡는다는 것은 국가의 절반의 통치를 하는 막강한 권력이라고 한다. 정반왕은 태자가 권력을 가지고 일을 하게 되면 출가라든가, 인생에 대한 회의가 없어지고 의욕적인 열정을 가지고 아버지를 이어 왕위를 물려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버지의 생각대로 농사를 짓는 일을 맡은 태자는 기대 이상으로 통치를 잘했다. 백성들도 훌륭한 통치자가 나와 농사를 짓는 일이 편해졌다고 칭송이 자자했다. 그러나 석가족이 농사를 짓는데 필요한 물을 대기 위해서는 인근의 강물을 끌어와야 했다. 그런데 이 강물은 석가족만 쓰는 것이 아니라 이웃부족인 구리족도 함께 쓰고 있었다.

비가 많이 올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가뭄이 지속되면 강물의 물을 끌어쓰는 문제로 석가족과 구리족은 분쟁을 겪어야만 했다. 부처님이 농사를 짓는 일을 총괄하는 직책을 맡은 후 심한 가뭄이 지속되었다. 구리족은 강에다 둑을 쌓아 석가족의 물길을 막고 자신들의 논에만 물을 대려고 하였다.

그러자 석가족은 몰려가 구리족이 쌓은 둑을 허물고 새로 둑을 쌓아 자신들의 논에만 물을 댈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일이 반복이 되자 두 부족간에 서로 싸움이 일어나고 급기야는 살상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석가족의 원로들이 모여 회의를 했다. 원로들은 이 기회에 더 이상 이러한 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군대를 일으켜 구리족을 정복하기를 결의하였다.

그리고 구리족과 전쟁을 할 군대의 총사령관에 부처님을 임명하였다. 부처님은 자신이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왕을 찾아갔다. 그리고 이번 분쟁을 전쟁으로 해결하기 전에 자신에게 맡겨줄 것을 부탁하였다.

부처님은 부왕의 허락이 떨어지자 단신으로 구리족의 왕을 만나 타협을 하였다. 그리고 하루씩 번갈아 강물의 물을 대기로 합의를 하고 돌아왔다. 이 소식을 들은 일반 백성들은 전쟁이 취소되었다는 전갈에 모두 기뻐했다.

그러나 석가족의 원로들과 귀족들은 부처님의 대화와 타협정치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구리족과 합의한 것은 굴복이며, 석가족의 위신을 추락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법에는 아무리 왕일지라도 원로들의 결정을 무시할 수 없으며, 원로들의 결정을 무시할 경우 사형이나 추방의 중형을 내리기로 되어 있었다.

정반왕은 부처님에게 사형의 징계를 가하기로 결정한 원로들을 설득하여 부처님을 추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은 정작 자신이 원했던 출가를 이제야 이루게 되었다고 오히려 기뻐하였다.

이상이 남방불교에서 전해지고 있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출가의 배경이다.

정치인 태자에서 깨달음을 얻은 이가 된 부처님,

그는 정치를 피하지도 않았지만 정치에 매몰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불교는 겉으로는 정치를 피한다고 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깊게 정치와 권력에 매몰되고 유착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앞으로 우리 불교를 다시 되돌아 보고자 한다.

- 이 글에 나온 부처님 출가이야기의 출처는 인도의 근대불교운동가 암베드카르의 "신불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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